포병 사령관 쿨리크 원수의 딴지로 탄생한 어정쩡한 개량형, T-34M!!
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지만, 강력한 권력을 보유한 한 사람이 간섭하면 산이 아니라 낭떠러지로 간다!!
  T-34의 생산 지연, 1941년 독일의 침공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다!!

코시킨 기사
  T-34의 아버지, 코시킨 기사. 원래 레닌그라드 전차공장 지대에서 수석 설계자로 근무하다가 쾌속전차를 개발하던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으로 전속된 후 이 곳에서 설계 중이던 신형 쾌속전차 A-20을 기초로 보다 강력한 76.2mm 주포를 탑재하고, 장갑을 강화하는 한편 광폭 궤도를 적용시켜 유명한 T-34를 탄생시켰다.
  하지만 포병 사령관 쿨리크 원수의 끊임없는 딴지와 더불어 T-34 전차에 너무나도 정열을 쏟은 나머지 과로로 병을 앓게 되었고 결국 1940년 9월 26일,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.
T-34M
A-32  코시킨 기사의 걸작, T-34의 프로토 타입 중 사실상 현재의 형태에 도달한 시제 차량인 A-32. 보다 강력한 대구경 76.2mm 주포를 탑재하고 광폭 무한궤도 및 대형 보기륜을 장착하는 등 대량 생산된 T-34/76의 형태가 확정되었다.
  독소전 기간 중 소련을 승전으로 이끈 주역,  T-34 전차는 너무나도 유명한 만큼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는 전차라 하겠다.
  하지만 이 T-34 전차가 소련에 제식채용되는 과정이 매우 파란만장했다는 사실은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까?
생산 중인 T-34/76  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T-34/76! 비록 V2 디젤엔진의 탑재로 요란한 소음과 매연을 냈지만 시속 55km라는 가공할 기동력과 우수한 공격력과 방어력은 판터나 타이거가 등장하기 전까지 현역으로 굴러다니던 그 어떠한 독일 전차보다도 우수했고 무엇보다 단순한 차체 구조로 인한 높은 생산성은 소련군이 승리하게된 원동력이 되었다.
  1940년, T-34 전차의 채용이 사실상 확정되어 제183 공장에서 500대,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서 100대를 생산하기로 계획되었던 차에 독일로부터 Ⅲ호 전차 2대가 수입되는 난항을 겪게 되었을 줄이야
  당시 요란하기 그지없던 T-34에 비해 비교적 소음이 적은 Ⅲ호 전차는 소련 기술진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안정된 서스펜션과 넓은 포탑 내부 공간, 그리고 전차병 개개인에게 지급되는 차내 인터폰 및 우수한 성능의 무전기 등 T-34가 Ⅲ호 전차에 비해 유리한 것은 공격력과 방어력 뿐이었다.T-34/76
  동계 위장 도장을 한 T-34/76의 대열. 
  1941년 모스크바 목전까지 독일군을 진입시킨 소련은 크나큰 위기를 맞이하지만 동장군의 내습과 더불어 후방에서 생산된 T-34/76 전차들의 활약으로 독일군을 퇴각시킬 수 있었고 이후 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대승과 더불어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, 바그라티온 작전의 성공 등 숱한 승전의 주역으로 자리잡게 된다.
  안그래도 T-34 전차를 개발하느라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된 세르게이 코시킨 기사는 이러한 정황을 가지고 딴지를 거는 포병 사령관 쿨리크 원수의 태클( 이 양반은 당시 스탈린의 최측근으로 막강한 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)까지 받아야 했다.
그레고리 쿨리크 원수  T-34의 설계 및 생산 자체를 원천 봉쇄하려한 포병 사령관 그레고리 쿨리크 원수. 1890년생으로 1950년까지 천수를 누렸다.
  보수적인 육군 장성으로 당시 스탈린의 최측근 중 하나이기도해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.
  그가 제안한 T-34M은 결국 채용되지 못했지만 그의 딴지로 인해 결국 T-34/76은 예정된 600대에 훨씬 못미치는 적은 수만이 생산되었고 이는 1941년 6월 22일, 독일의 침공과 함께 소련에게 치명타가 되어 돌아왔다.
  쿨리크 원수는 코시킨 기사의 상관인 리하초프가 자신의 라이벌이라는 이유로 어떻게든 T-34의 채용을 막기 위해 애를 쓴 양반으로 초창기 'T-34에 탑재될 76.2mm 주포가 너무 약하니 107mm 주포를 탑재하라', '이런 전차보다는 BT 계열의 쾌속전차를 생산하는 것이 낫다!' 식의 태클을 시시건건 걸어왔던 것이다.
  이 T-34M( A-43 )은 그러한 쿨리크 원수의 태클이 절정에 이른 시제형으로 KV-Ⅰ과 같은 전형적인 중전차의 외형을 갖추고 있다( 사실상 설계 중단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)
  1940년 9월 26일, 코시킨 기사가 결국 사망하자 모로조프가 수석 기술자가 되어 설계는 재수정되었지만 쿨리크 원수는 이 때까지도 계속 딴지를 걸어 T-34M의 개발이 완료될 때까지 기존 T-34의 생산을 중지할 것을 제의하는 판국이었다.
  결국 쿨리크 원수의 딴지 및 몇몇 악재로 인해 1940년 제183 공장과 스탈린그라드 트랙터 공장에서 생산될 약 600대의 T-34/76은 겨우 117대만이 생산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.
  사공이 많으며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무능한 권력자 한 명이 나타나면 낭떠러지로 가는 격이었고 당시 모로조프를 비롯한 T-34의 개발진들이 그러했다.

아스트랄한 T-34M
  물론 이러한 결과는 자연히 소련에게 치명타가 되어 돌아왔다.
  바로 1941년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. 개전 초기 배치된 T-34/76의 수는 너무나도 적었고 이 한줌도 안되는 차량들로 절망적인 반격을 감행했던 소련군 전차병들은 어느 정도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전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.
  만약 충분한 수의 T-34/76이 생산돼 배치되었다면 전황은 또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지도 모르지만...


   당시 독일군이 받은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. T-34의 등장으로 독일은 결국 보다 강력한 중전차인 판터와 타이거를 실전에 투입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된 것이다.